명이

미국에선 겨울이 끝나면 정원을 다듬고 봄을 준비하곤 합니다. 맨하탄이든 서울이든 아파트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이 뒷뜰을 갖게 되면 그냥 보고 참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양있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들이라면 꽃을 심거나 풀숲을 가꾸는 등의 ‘가드닝’을 하곤 합니다만, 한치의 땅이라도 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을 수 없는 한국인들은 무어라도 생산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틈에 한국인들은 스티븐연의 뒤를 따라 영농 후계자들이 되어있습니다.

미나리가 오스카를 수상하던 때는 마침 봄이 오던 때 였습니다. 스티븐연이 아들에게 던지는 “빅가든을 만들거야” 라는 대사는 나름 갓 미국에 건너온 햇영농인들 사이에선 유행어 아닌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저희 팟캐스트에서도 미나리를 다루었으니까요.

클럽하우스

클럽하우스는 음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SNS입니다. 초대를 기반으로 가입이 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친구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저 역시 2001년부터 20년째 이런 뻘짓들을 추천해주시는 Pix님을 통해 가입하였고, 동네 뉴욕 / 뉴저지의 지인들에게 초대장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초대를 주고 받은 사람들이 이래 저래 자주 방을 만들어서 수다를 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뒷뜰에 무얼 심을지 시시콜콜한 정보를 주고받다가 영화 미나리도 대화의 주제로 끼어들었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미나리를 가지고 농을 주고 받아보니 어느새 농담이 시놉시스로 변하면서 오가고 있었고, 영화의 제목도 만들어졌습니다. ‘미나리 2 – 명이.’ 도대체 어디서 명이 나물이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빅가든을 만들거야’ 대사 하나만으로 어느새 대화방에 있던 이민자 아버지들은 명이 나물 농장의 꿈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급발진을 한 찬재님 – 역시 Mac 사용자로 20년 전부터 알게된 – 명이 나물 씨앗을 이베이에서 찾아내기 시작했고, 뉴욕의 씨지 모임에서 10년전에 만난 다슬씨는 모종의 판매처를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에서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들 어느새 홈디포를 뒤져서 raised bed – 텃밭을 주변의 정원과 구분지어주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공간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나무틀 – 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찬재님이 분양해주신 600여개의 명이 나물 씨앗을 얻어서 너무 햇빛이 많이 들지 않는 뒷뜰의 한 구석에 ‘빅가든’을 만들었습니다. 농업이라는 퀘스트는 순서와 시간을 놓치면 구해놓은 재료가 모두 쓸모가 없어져버리곤 합니다. 씨를 불리는 과정에서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어렵게 구해주신 씨앗을 다 버리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며 일단은 씨를 땅에 뿌려두긴 했지만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2013년

다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뉴욕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우리 가족이 뭉쳐서 자리를 잡을 즈음이었습니다. 니자가 뉴욕의 아티스트 모임 KANY (비공개 페이스북 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이 모임에서 또다시 몇몇의 걸어왔던 길이 겹치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송준택이라는 분 역시 그런 ‘건너 건너’ 인연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픽스님과 함께 맥다모 등의 PC통신 시절 매킨토시 동호회 회원이었던 것이죠. 지금은 KANY 활동이 뜸해졌지만, 당시에 만났던 분들은 시시 때때로 만나뵙곤 합니다.

송준택님 역시 그렇게 뜬금없이 한번씩 뵙곤 합니다. 그날도 별 일없는 주말 오후였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이유로 송준택님과 미셸님 부부가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산책을 나갔다가 산속에서 명이 나물을 보고는 이걸 저희에게 주면 좋겠다 싶어서 들렀다는 겁니다! 이분들이 어느 경로를 통해서도 저희가 명이나물을 키워보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들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명이나물은 커녕 텃밭을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못하셨는데 말이죠. 이 명이는 그저 삼겹살에 싸서 먹으면 맛있을테니 드시라는 정도로 가져오셨던 것이었던 겁니다.

그 동안 있었던 명이나물에 관한 이 사람 저사람들과의 대화 내용들을 전하고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단 말인가 하며 늦게까지 대화는 이어졌습니다. 우연히도 명이를 뿌리까지 파오신 덕에, 그 대화 끝에 명이를 심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명이들을 텃밭에 심어두었습니다.

빅가든

이제 몇개월이 지나고 잎도 없이 줄기만 쭉 자라던 명이가 열매인지 꽃인지 씨앗인지 알 수 없는 동그란 것들을 줄기 끝에 달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겨울이 지나보면 이 텃밭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집니다. 정말로 빅 가든일지는 몰라도, 매킨토시 동호회에서 시작해서 알게된 사람들이 20년의 시간을 두고 그 길이 얽히고 섥혀서 저희집 뒷마당에 명이나물 텃밭을 만들게 되었다는 긴 이야기를 담은 가든은 될 것 같습니다.

PS. 그날 저녁 송준택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따님이 내쉬빌에 있는 대학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다음 주에 저는 내쉬빌로 출장을 갔습니다. 이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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