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낭비

나에게 고등학교 생활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수업 중에 베를린 천사의 시를 봤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인 것 같아.” 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결단코! 베를린 천사의 시가 나의 인생을 바꾼, 적어도 가장 감명깊은 영화일리가 없다. 처음 VHS 테입으로 본 일본 AV가 준 충격의 흥분이 +100이라면 베를린 천사의 시가 준 충격적인 지루함은 -100에 해당할 것이다. 아직도 전체 내용은 모르겠고 다시 볼 생각도 없다. 게다가 그 독일어 듣기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은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그 선생님의 수업 결과는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한 그 수업을 들은 6개의 반 학생들 중에서 잠들지 않은 자는 없었다. – 아무도 그 영화 후반에 컬러가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 나에게도 감동이 없었고 (봐야 감동이 있지!) 그러니 그 선생님의 시도도 실패일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그런 걸 (순진하게) 들고와서 “얘들아. 이거 좋은거야. 한 번 봐봐.” 라고 하는 시도를 하는 사람을 봤다는 것, 그런 낭만적인 낭비를 서슴치 않는 사람을 겪었다는 것에 감사하다.

그 외에도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는 다른 방식의 원주율Ω의 증명을 보여주셨던 조계성 선생님이나 당신이 직접 찍은 문화재 사진들만으로 수업을 했던 박건호 선생님, 뭐 그냥 모든게 낭만이었던 신상원 선생님. 그런 분들의 비효율적인 멋스러움, 그러니까 그들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 수업을 만들려던 고민, 자신의 직업에 대한 양심같은 것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 그리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도 하나 있다.

Als das Kind Kind War…. 아이가 아이었을 때…

이거 약간 무슨 주문처럼 계속 중얼 중얼 거려서 뭔지 몰랐는데, 시란다. 유명하단다. 정말 시간이 너무 남아서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영화에 나오는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역시, 한글 번역을 읽어보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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