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구월

나중에 뭔 일이 있었나 기억을 잘하는 경우는 일기를 써두었거나 블로그를 써두었을 경우이다. 구지 그 일기나 블로그를 다시 읽어보지 않더라도 적어두면 잊지 않는다. 당연히 안적어두면 거의 다 까먹는다. 그리고 꼭 뭘 잊거나 / 잊지 않거나가 중요한 건 아니고, 일년쯤 지났을 때 아무것도 안한 기분이 들거나 / 들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무언가 적어두려고 한다. 이런 저런 노트를 꾸준히 사용하기도 하지만 꾸준히 잃어버리는 탓에 아이폰에 적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성에 차는 앱을 발견하기 힘들어서 이것 저것 옮겨다니다 보니 꾸준하지 못하게 된다. 꽤나 깔끔해서 데이원이라는 놈을 쓰다가 지금은 모멘트라는 것을 쓰기도 한다. 뭔가 다 되는 것 같지만 너무 너저분해서 에버노트는 설치 후 일주일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곤 한다.

팔월은 바빠서 사진도 별로 없고 글도 많지 않다. 샌프란시스코의 헌터스포인트/캔들스틱포인트라는 원래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야구장을 이전하고 새로 생기는 도시의 프로젝트를 마쳤다. 사실 워낙 장기 프로젝트라서 이미 마스터플랜은 나와서 계속 수정되고 있고, 그 부분의 스트리트스케이프 – 경관 계획 정도로 번역하면 될지 모르겠지만 많이 다르다. – 를 마쳤다. 건물 설계에 비유하자면 실시에 가까운 작업인데, 거짓말로 마스터플랜은 많이 그려봤지만 가로수의 위치와 가로등의 갯수까지 세서 실제로 견적을 내고, 사용될 벤치들의 스펙과 제품들의 가격까지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만만치가 않았다. ‘미국식’으로 일한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할 수 있던 좋은 경험이었다. 나무 하나 심는 도면 한장 내 맘대로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로 바보짓을 많이 했는데, 같이 일한 성실한 친구 마이크 덕에 – 덕이라기 보단 실질적인 진행은 마이크가 했다. – 최종 리포트를 제출했을 때 파트너들이 꽤나 칭찬을 해주었다.

그 와중에 송이하고 공모전을 하나 제출하였다. 상금이 많거나 뭘 짓거나 하는 공모전이 아니라, 글을 써야하는 공모전이어서 가볍게 해보자고 시작했는데, 모자란 영어에 게으름이 합쳐져서 막판에 꽤나 난리를 쳤다. 헐렁한 공모전이라 결과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겠다.

뉴욕시의 수해복구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니 다른 수해복구가 기다리고 있다. 거의 6개월 가까이를 수해복구 관련 프로젝트들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좀 더 잘 적어둬야겠다. 단순히 수해복구 차원이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것이 아니지만, 적절한 이유에 적절히 대처하고 있는 듯 하다. 이 논리들을 한국 버전으로 치환하면 어떨까. 사대강은 아니겠지요. 샌디가 왔다간지 1년이 다되어갔는데, 여전히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고, 아직도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모두가 바쁘지만 그 와중에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도면 한 장 그린 일 없지만 지난 몇년 간 했던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깨닫는 것 같다. 참. 자랑 아닌 자랑이라면, 최신 수해복구 프로젝트는 유명하신 왕건축가님들과 경쟁한다. 리빌드바이디자인

지난 프로젝트 동안 라이노를 (라이노답게)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도, 워낙 라이노질에 재미를 붙여놔서 괜히 피씨한대를 마련해서 남는 시간에 이런 저런 장난질을 치곤 했다. 특히나 그래스호퍼를 가지고 노는 재미는 쏠쏠하다. 원래 지금 회사는 거의 전통건축을 하시는 회사여서 어반 디자인 팀 외에는 백인 취향 99칸 부잣집 설계하는 분들이라 라이노라든지 스크립트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물론 레빗같은 경우엔 직접적으로 도면을 치는데 도움을 주니까 많이 도입을 한 모양인데, 디자인은 여전히 손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도 다들 최신 유행에 뒤쳐지긴 싫어하는 모양인지 세미나를 어반디자인 팀에서 준비하기로 하였다. 어반디자인 팀이 절반 이상 컬럼비아 출신인데, 뭔가 선입견 – 컬럼비아 출신은 뭔가 똥도 디지털로 쌀 것 같아 – 은 미국애들도 마찬가지인지 우리팀으로 세미나 화살이 돌아왔다. 결국 돌고 돌아 밥도 디지탈로 먹는다고 믿는 사우스 코리안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그래서 집에 와서 라이노 켜보니 라이센스 익스파이어. 이걸 또 언제 새로 다운받아 깐단 말인가. 누가 정품 이런 거 협찬 좀 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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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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