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를 위한 공공 디자인 공모전에 21세의 학부생 린이 142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선하였다. 58253명의 전사한 참전 용사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돌벽은 1982년 10월 완공되었고, 같은 해 10월 13일에 봉헌되었다. 화강암에 V자 모양의 벽은 한쪽은 링컨 기념관을 향하고 있고 다른쪽은 워싱턴 기념비를 향하고 있다.
린의 개념은 땅에 개구부 혹은 상처를 새겨 전몰 용사의 엄숙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디자인은 처음엔 기존의 전쟁 기념관에겐 파격적인 것인터라 논쟁의 도마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디자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또한 린이 아시아 출신이라는 것도 트집잡았다. 그러나, 이 기념비는 이후 베트남 참전 용사 가족들에게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고, 매일 그들의 기억에 남는 유품과 기념품들을 남겨두는 곳이 되었다.
린은 만약 그 공모전이 “무기명”이 아니었다면, 이름대신 숫자로 제출하지 않았다면. “절대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린은 미국 의회에서까지 자신의 디자인을 지키려했고, 결국 타협안에 이르게 되었다. 청동 군인 군상과 미국 국기가 기념비의 한쪽 끝에 놓이게 되었다.
1981년 ((81년생이 서른을 앞두고 있다.)) 에 기념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미국스러운 질떨어지는 논쟁 ((베테랑분들 등장해주시니)) 이고, 결국 미국스럽게 타협을 하게 된다. 내 성격상 마야 린같은 심오한 디자인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리얼리스틱한 동상을 보고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도 않는다. 또 시대가 시대이지 않은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디 용사들의 기념비가 땅속으로!’라는 사람들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이 지하로 들어간다고 징징대던 사람들 또한 떠올라주신다.)) 과 추상성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라는 것.
그러나
도대체
이 세종대왕 편안히 앉아계신데는 논쟁의 여지조차 없다.
아, 쫌 있긴 하다.
그러나 신하로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입상(17m)과 비교할 때 좌상이긴 하지만 세종대왕상(9.5m)의 눈높이가 턱없이 낮은 점은 앞으로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이순신장군 동상은 차량 탑승객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고, 세종대왕 동상 높이는 보행자들의 눈높이에 맞췄다”며 “세종대왕상을 너무 높게 만들면 대왕의 발만 바라봐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광화문광장 중심에 세종대왕像 `우뚝’
아아. 얼마나 중요한가. 신하인 장군이 눈높이가 높다니! 아아 그러나 백성을 굽이보는 세종대왕은 보행자를 위해 몸을 낮추셨다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동안 세종로에 무슨 제대로 된 공모전이 있기를 했나 (정확히는 여러번의 공모전이 있었고, 여러 사람의 제안이 있었다) 세종대왕 동호회에서 돈을 내기를 했나.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할 말을 잃고, 체념할 뿐이다.
One response to “세종대왕”
화룡쩜쩜..